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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필작가입문은 빈곤에 노출된 가정과 가장의 책임감 때문

대필작가로 입문하게 된 것은 큰 목표라기보다는 생계를 위해 뛰어든 측면이 큽니다.

 

저는 문단출신이 아니고, 전공역시 영문학('99)입니다. 대학 저학년때는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르는데 영문도 모르고 영문과에 입학했겠지만, 문과출신들은 빨리 다른 자격증을 준비하라하셨습니다. 처음엔 무슨말일지 몰랐으나 점차 그게 현실로 와닿기 시작했습니다. 졸업후에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학교다닐 때 글은 썼지만, 작가라는 직업을 1순위로 놓지는 않았습니다.

 

 

졸업후 여의도에 컨설팅회사도 다녔는데 무역회사도 잠시다녀보고 회사파산(2008~9)도 당해보며 실업과 직장생활을 시한부로 왔다갔다하는 부침이 심한 사회생활을 겪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문과라서 죄송한 시절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직장생활 다니면서 글쓰기는 계속되었고 주말이면 국립중앙 도서관에 파묻혀 책보는게 일상이었습니다. 직장인들이 회사에 충성하지 않고 책을 쓰거나 혹은 부업을 하는 것은 직장에서 별로 좋지 않게 보여지는데 당시에 저의 모습이 회사 눈밖에 나면서 구조조정(2011)도 당한거 같습니다.

 

당시에 서울에 살다가 부모님께서 대출해주신 제가 모은돈으로 성남으로 내려가 12천만원짜리 33년된 재건축을 앞둔 성남의 노후 아파트에서 살았습니다. 제가 1살 딸이 있었는데, 제 생일에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면서 준비되지 않은 퇴출에 충격이 컸습니다.

 

 

최초가 되라, 스스로를 고용하라

당시에 충격에 빠진 저를 구원해준 책이 있었는데 돌아가신 구본형 선생님의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신혼여행때 가져간책이었는데 언제까지나 계속될수 없는 직장생활대신 제 스스로가 최초가 되라는 구본형선생님의 글귀가 저를 이끌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글을 써놨습니다.

 

매일 새벽2~3시정도에 일어나서 책을 읽으면서 제가 가장잘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지금 있는 자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봤습니다. 당시 노트북1개랑 2G폴더폰이 전부였기에 이걸로 일단 할수있는일을 찾아보자, 시작한 게 도서관에 들어가 글을 쓰는일이었고, 퇴직금 받은 얼마의 금액으로 도서관생활 3개월정도만 하자고 생각해서 성남시에 있는 시립도서관에서 글을 쓰기시작했는데 그 글이 잘되어 베스트셀러대박이 터졌으면 극적인데, 현실은 그게 아니더군요.

 

 

그래서 대필을 시작했습니다. 출판사에서 수고료정도로만 받아서 일을시작했고, 자기소개서같은것도 써주기 시작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직접 대필작가로 일해보니 대필작가가 무슨 일용직 정도의 처우와 비슷했습니다. 그때부터 시립도서관에서 터를 잡고 3개월 만 다니겠다는 도서관을 무려 7년간을 출퇴근하며 원고작업 실무를 해왔습니다. (2011~2018)

 

 

 

생계는 대필로 하되, 무려 7년간 무인도에 고립된 로빈슨크루소처럼 도서관에서 독서만 해댔습니다.( 6천권 정도.) 동서양인문고전(손자병법, 논어, 일리아스, 제자백가, 장자, 정부론, 국부론, 리바이어던. 니체전집..)은 물론 보수, 진보 경제사상적 토대가 되는 각종서적들(마르크스자본론, 공산당선언. 자유주의 하이에크 자유주의, 노예의길 등)은 물론 정치,경제,사회,문화 경제경영 원론, 세계사, 미국사에 이르기까지 책을 읽을수록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의문을 해소할 수는 있었지만, 도서관 생활이 7년을 넘어서면서 이상하게 사회적으로 고립되어가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이때까지 대필분야에서도 어느정도 입지를 다져나가기 시작할 즈음이었고, 이 정도 실력이라면 저처럼 혼자서 일하는 분들도 많을것이라 생각하며 협회조직을 시도했는데 처음은 잘 안되었습니다. 조직기준에 맞지 않고, 대필이라는게 이름자체에서 오는 음습한 뉘앙스 문제 때문인지 허가를 안내 주더군요. 그래서 담당공무원을 찾아가서 대필작가가 무슨일을 하는지 상세설명후에 다시 협회등록을 했더니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젊은 예술가의 죽음과 이를 방치하는 사회, 그리고 대필작가협회

 

2014~15년도 도서관에서 협회조직을 시작, 7명~10명정도를 모아서 협회를 만들었는데 그게 지금 500여명의 대필작가협회로 성장했습니다만 인원이 몇 명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대필작가로서 이분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와 이런 자부심을 협회장으로 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해 보였습니다.

협회를 조직한 이유는 대필작가로서의 권익보호를 스스로 하기 위함이고, 2011년정도인가 유망한 시나리오작가님이 월세밀리고 병마와 굶주림에 시달려 돌아가시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유망한 작가님의 죽음에서 솔직히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돌아가신 시나리오 작가님은 김영하 작가님의 제자셨고, 김영하 작가님도 애도하셨던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사건에서 여러 논쟁이 있었지만 저는 김영하 작가님이 자신의 블로그에 신춘문예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피력한 뒤 누군가를 작가로 만드는 것은 타인의 인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긍지이며 인정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고 스스로를 작가로 선언하고 제멋대로 써제끼는 새로운 작가군의 출현을 고대한다고 적어두신 글을 읽으면서, 문단출신도, 문학가도 아닌 제가 대필작가로 마음대로 써제낄 때 독자들이 좋아한다면 이것은 새로운 작가군으로 봐도 되겠다는 확신과 함께 작가는 최소한 굶어죽지는 말자고 생각하며 작가의 입장에서 협회를 어떻게 이끌지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협회의 일감을 지속적으로 개발하여 작가님들께 꾸준히 제공하고 세상에 인정받지 못한 작가님들께 꾸준한 일감을 발굴, 제공하는 것이 협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일반적 협회와 다른 대필작가협회만의 운영 방향이 되었습니다.

 

 

 

제가 대필작가인데 구본형 선생님의 최초가 되라는 글처럼 저는 한국에서 책쓰기 전문가인 대필작가로 드러내놓고 일하는 최초가 됨과 동시에 다시는 직장인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적동기로는 제가 아이가 셋인데 적어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책쓰기 전문가로 대필작가라는 평판을 듣고 있는데 직업적인 전문성과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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